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/사례 (문단 편집) ==== [[신성 로마 제국]]☆ ==== || [[파일:신성 로마 제국 국기(후광 포함).svg|width=400]] || ||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기 || |||| '''원인''' || || 전쟁 ||'''내전([[30년 전쟁]])'''[br]'''소모전([[30년 전쟁]])'''[br]'''외세가 무력으로 제압(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나폴레옹 1세]])'''[br]'''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([[프랑스 혁명 전쟁]])'''|| || 내란 ||봉기|| || 내정 ||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 원수[br]'''갑자기 사망하거나 부재중인 지도자 ([[대공위시대]])'''[br]'''무능한 지도자([[루돌프 2세]])'''[br]'''[[개신교]]에 대한 탄압([[페르디난트 2세]])'''|| || 공황 ||약해진 황제의 권위([[금인칙서]])[br]'''국가의 분열([[30년 전쟁]])'''|| |||| '''결과''' || || 멸망 ||국치(흡수), 소요(분리독립) || [[신성 로마 제국]][*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 자체도 문제가 있긴 하다. [[카롤루스 대제]]가 교황청에 의해 [[신성 로마 황제|서로마 황제]]로써 [[대관식]]을 했을 당시에 [[서로마 제국]]은 멸망했지만, '''[[동로마 제국|둘로 나뉜 로마 제국의 다른 반쪽은 살아있었다.]]''' 당시에 사람들도 동로마 제국을 보고 [[로마 제국]]이라 하고 제국의 시민들을 [[로마인]]들이라 불렀다. 그런데 카롤루스 대제가 갑자기 [[교황]]에 의해 [[서로마]]의 황제로써 대관을 하면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사실상 '''2명'''이 되었고, 실제로도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교황청이 세운 신성 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써 인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.]은 [[14세기]] 무렵부터 나라가 망해가기 시작했었다. 신성 로마 제국은 그 당시 [[대공위시대]]가 막 끝나고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[[루돌프 1세]]가 즉위한 때였다. 그 당시에 신성 로마 제국은 특이하게도 [[선거군주제|투표로 황제를 뽑는 방식]]이였는데 이때 [[선제후|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영주들]]이였고, 이랬기에 황제는 사실상 영주들에 의해 정해지며, 당연히 황제의 권위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. 더군다나 이후 [[카를 4세]]의 [[금인칙서]]에 의해 제국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사실상 독립국처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, 이때부터 황제의 권위는 더욱 더 약해지며, 황제는 자신의 영지에만 영향권을 행사하는 수준이였다. [[15세기]] 중반 무렵 [[합스부르크 가문]]이 지속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독점하며 영향력을 더 넓히자[* 물론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선거군주제가 유지되고 있어서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의 [[프랑수아 1세]]가 황제 선거에 출마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[[카를 5세]]와 대결하기도 했다.], 그만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 역시 넓어지며 신성 로마 제국은 해외 식민지를 얻기도 한다.[* 다만 이게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. 단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권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 뿐이다.] 이때 [[교황청]]의 [[면죄부]] 판매에 반대하고 [[95개조 반박문]]을 내걸은 [[마르틴 루터]]로 인해 [[종교개혁]]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. 이 무렵 독일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중세 [[봉건제도]]에 반발해 농민 전쟁을 일으킨다. 농민 전쟁은 진압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이로 인해 혼란스러워지며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 곧 마르틴 루터의 [[종교개혁]]은 온 유럽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유럽은 [[가톨릭|가톨릭교]](구교)파와 [[개신교]](신교)파, 두 세력으로 나뉜다. 이러한 상황에서 [[페르디난트 2세]]가 개신교에 대한 탄압에 나서자 반발한 개신교 제후들과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은 내전이 일어나고 결국 [[30년 전쟁]]이라는 국제적 종교 전쟁으로 확대된다. 이 30년 전쟁은 페르디난트 2세의 실책, 주변국들의 개입으로 인해 장기화되었고 결국 제국을 제대로 파탄내고 만다. 나중에가면 1648년 [[베스트팔렌 조약]]을 체결하므로써 개인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게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영향력을 잃게 되는[*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개신교(신교)파를 지지하던 영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.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남부 [[독일]]과 [[오스트리아]]에만 끼쳤고 그 외의 지역에선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.] 동시에 [[네덜란드]], [[스위스]] 그리고 북부 [[이탈리아]]를 잃게 되며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되고 인구 역시 30년 전쟁 이전과 비교했을 때 '''2/3''' 수준으로 떨어졌다. 17세기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프랑스의 철학자인 [[볼테르]]는 신성 로마 제국에게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. >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'''딱히 신성하지도 않고, 로마도 아니며, 제국은 더더욱 아니다.''' 위의 평을 내렸을 정도로 신성 로마 제국은 상태가 영 아니였다.[* 비단 볼테르뿐만 아니라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독일의 작가였던 [[괴테]]는 '''"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."'''라고 말했다고 한다. 이 발언도 위의 볼테르의 평과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이 허물뿐인 제국이라 느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알 수 있다.]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이유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당시 세계의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.[*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의 중부유럽에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벌어진 '''일들이 하나 같이 개판이었던지라''' 맞는 말이 되었다.] 그러던 중, 프랑스에서는 [[프랑스 혁명]]이 일어나면서 프랑스가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자, 신성 로마 제국은 이때를 노려 [[오스트리아]]와 [[프로이센]]을 필두로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패하고 프랑스한테 공격받아 [[라인 강]] 서안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된다. 이 무렵 프랑스에선 [[나폴레옹]]이 정권을 잡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, 나폴레옹을 지지하던 영지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던 주요 세력인 주교령 및 기사단령을 갈라먹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[[프란츠 2세]]는 영향권을 완전히 잃는다. 프란츠 2세는 [[오스트리아 제국]]을 세워 남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나폴레옹이 자신이 독일에 영향권을 행사하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최후통첩을 통해 해체를 요구했고 여기서 일부 16개 영지들은 나폴레옹을 동맹의 보호자로 삼는 [[라인 동맹]][* 라인 동맹은 말이 그렇지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항복하고 괴뢰국이 된 셈이였다.]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했다. 결국 그 해 8월 6일,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포기하고 기타 제국의 지위를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므로써 '''1006년'''[* 참고로 이건 [[카롤루스 대제]]가 대관한 기준이고, [[오토 대제]]가 대관한 기준으로 치면 '''844년'''이다.] 간 이어져온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한다.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, 독일인들에게 있어선 애착의 대상이였다. 실제로도 [[빈 회의]]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했을 정도로 애착이 대단했고, 이후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가 독일을 통일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[[독일 제국]]을 선포했을 정도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